신은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정설)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다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책을 읽고 심심찮은 깨달음을 얻은 나
의 하찮고 두서없는 이야기
《신약성서》의 <로마서> 8장 30절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있다.
" 신은 미리 정해진 자들을 부르고, 부른 자들을 의로 삼으며, 의로 삼은 자들에게 영광을 내렸다. "
성서를 읽다보면 다음과 같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말을
키워드처럼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종교에 대한 간단한 내 고찰인데 주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으니 읽지 않을 사람들은 넘어가도 상관없다.
종교를 갖지도 않고,
사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종교, 특히 기독교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크리스마스도
결국 성탄절(聖誕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기리는 날이며.
올해가 2023년인 것도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고
추정하는 해를 기원으로 하는 기년법을 말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고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는
기독교의 계율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처럼 좋든 싫든 우리의 많은 부분들은
이미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있다.
다음은 예정설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
기독교에서 16세기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이어진다.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라는 뜻은
원래 '반대하다', '싸움을 걸다'라는 의미로,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천주교(天主敎),
즉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부패해버린 중세 가톨릭 교회는
당시 돈을 제시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면죄부'를 발매하며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루터는 이들의 가장 큰 재원인 면죄부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이들의 부패를 들추어낸다.
이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서두에 언급한
'예정 Predestination'.
즉,
어떤 사람이 신에게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
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면죄부는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
프랑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은 더 나아가
" 면죄부에 의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애초에 선행을 베풀었다거나 악행을 거듭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아무 상관이 없다. "
라고 주장한다.
즉 생전에 덕을 쌓든 죄를 쌓건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몇 백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고,
분명한 시대적 상황과 맥락이 존재한다. 현재 예정설을 인정하는 종파도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척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것.
그 점을 깨닫고 한동안 놀랐다.
" 어차피 미리 다 정해져 있다. "
누군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면,
대부분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기에 대한 인식과 크게 모순을 일으키는 듯하다.
"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결과는 절대 노력을 배신하지 않아! "
노력과 대가의 관계에서,
노력의 동기는 상응하는 대가에서 비롯된다는 사고가 보편적이다.
하지만 예정설에 따르면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중세 시대에서 쫓던 구원이라는 가치는
오늘날에 와서 '성공'이라는 시대적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다 정해져 있다.
성공할 사람은 미리 다 정해져있다.
이런 말들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듯하다.
결국엔 될놈될, 빈익빈 부익부라는거냐 이놈들아.
노력 끝에 맺을 결실을 간절히 바라며
열심히 달려나가도 모자랄 판에
찬물을 끼얹고 기를 꺾어버리는 이야기가 아닌가.
모든 의욕을 잃고 체념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혹은 이렇게 흥청망청 살아도
결국 나는 성공할 것 이라던가.
또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인
가치관으로 변해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
는 것을 막스 베버 Max Weber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밝힌다.
사람들은 '자신이야말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인간'
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자신의 일에 더욱 몰두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금욕적으로 절제하며 살아간다는 것.
이러한 경향들이 곧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예고된 대가,
즉 노력과 대가의 단순한 인과관계가
오히려 동기부여를 훼손시킨다는 사실은 학습 심리학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의
메타 분석 실험에 따르면
대가를 약속받은 사람들은 자발적 동기가 저하되며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대가를 얻기위한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버린다.
단순히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바라보아도 그렇다.
'철밥통 공무원'이라는 이야기처럼, 짤리지도 않고 열심히 하건 말건 정해진 월급을 받으며 따박따박 연금이 나오는 공무원과 성과와 평가에 따라서 리워드에 영향을 받는 회사원들.
경찰서에 전화하는 것보다
삼성 서비스 센터 직원이 훨씬 친절하다.
실제로도 세상은 노력한만큼
대가를 주는 것 같지 않다.
나보다 대충 사는 것 같은 사람이
기회를 채가는 경우는 아주 많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혹시 내가 그 수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지,
기대한다.
아니 애초에
노력한만큼의 대가가 주어지는 세상이라면
누구나 100만큼 노력하면
다 100만큼 성공할 수 있다면,
아이유 정도로 노력하면 아이유만큼 돈을 벌 수 있고,
유병재만큼 노력하면 유병재만큼만 돈을 벌 수가 있다고 한다면.
끔찍한 노력 끝에 찬란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누군가 같은 노력을 기울여
똑같은 성공을 가져갈 수 있다면.
눈부신 성공이 완벽한 인과율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재미 없는 세상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게 성공이라면
정말 아무런 설렘도 기쁨도 없을테니까.
(참고: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2019, 다산초당, 75-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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