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안까먹기] 욕망의 아이콘, 맥베스?
지난 3회차 모임까지는 '회색'을 주제로 이것저것 먹어봤습니다.
(아직 글은 안 썼는데..! 틈틈이 써보겠습니다ㅎㅎ)
이번 모임부터는 '욕망'을 주제로 다양하게 읽기로 했고, 유명한 희곡으로 운을 뗐습니다.
유명한 희곡 : <맥베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입니다. 제목은 익숙하지만 막상 읽어보지는 않은, 흔히 말하는 '고전'이죠. 그래서 저희도 솔직히 어떤 책인지 잘 몰랐습니다. '맥베스라면 욕망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지' 하는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또, 보통 소설이나 비문학은 익숙하지만 '희곡'은 낯선 장르니까 이 기회에 다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어요.
조사하다보니까 각 비극의 주인공마다 각기 다른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언급되고 있길래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 햄릿 : 우유부단함
- 리어왕 : 교만
- 오셀로 : 질투
- 맥베스 : 야망
우리가 읽은 맥베스는 4대 비극 중에서 가장 분량이 짧고 전개도 빠르다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책을 보면 바로 느끼겠지만 엄~~~청 얇아요. 어디 가서 고전 좀 읽었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맥베스>만큼 가성비 좋은 선택지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 동화 같은 이야기라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요(!).
간단 줄거리
(시공간적 배경 : 내전 중인 스코틀랜드. 대충 중세시대 영국.)
- 글래미스 지방의 영주인 맥베스는 다른 지방 영주인 뱅코우와 함께 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돌아가는 길에 세 명의 마녀와 마주침. 마녀들은 맥베스가 코더 지방의 영주 자리도 얻게 될 것이며 결국엔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사라져버림.
- 때마침 왕이 파견한 장군들이 맥베스 일행을 찾아와서 왕이 맥베스의 전쟁 공로를 인정하여 코더 영주 자리에 그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전함. 예언의 일부가 성취되자 맥베스는 '내가 진짜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왕을 죽여 왕위를 빼앗아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부인에게 털어놓았고, 부인은 그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암살하라고 강하게 떠밂.
- 결국 맥베스는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겨 성공적으로(?) 왕이 되었고, 이야기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폭군이 된 맥베스의 죽음을 향해...
이야깃거리
1. 전반적인 감상
누가 만약 <맥베스>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변 사람에 대한 일종의 탈무드' 같은 책이라고 말해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변 사람'이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사람을 말합니다.
저희가 책을 읽기 전에 갖고 있던 '맥베스 = 욕망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맥베스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려는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일부가 실현되었을 때 맥베스는 당장 왕을 어떻게 시해할지 계획하거나 속으로 기뻐하기만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진짜...?? 내가 왕을 죽여야 한다고...?' 정도로 고민했죠. 문제는, 그런 고민을 부인에게 털어놓았을 때의 부인의 반응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가히 가스라이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어요ㅋㅋ.. 400년 전통 원조 가스라이팅. 부인한테 가스라이팅 오지게 당한 맥베스는 결국 왕을 암살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맥베스는 자기 자신의 욕망(그것도 애초에 진짜 자기 욕망이었을까도 의심됨)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단단하고 변함 없는 인물상이 아니었던 거죠. 말랑말랑해서 주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연약한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인지 훨씬 현실적인 인물로 다가왔고, 꼭 우리 독자들을 비추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앞서 제가 '일종의 탈무드'라고 소개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꼭 작가가 우리에게 '너희 주변에 마녀 같은 돌팔이나 화를 부르는 맥베스 부인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감상을 공유하니까 승민이가 공감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인물을 통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전개가 진~~~짜 빨라요. 덕분에 지겹지도 않아서, 주석 안 읽고 마음 먹고 앉아서 읽으면 누구나 1~2시간 안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떡밥 회수도 좋았구요! 애초에 예언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니까 이야기 전체가 그 예언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잖습니까? 모호했던 예언이 실현되는 방식이 재밌었고, 빠진 예언이 없어서 깔-끔하고 탄탄하게 쓰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맥더프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는 방식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유일하게 스포하기 아까운 부분이니까 어떻게 예언이 실현되는지 말하지 않겠음!)
2. 인상깊은 인물, 이유
단연코 맥베스 부인! 만약 영화였다면 강력한 팜므파탈로 묘사되지 않았을까! 왜 왕위에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렸을까요? 당사자인 맥베스보다 훨씬 강하게 욕망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욕망의 크기가 보통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사실 부인이 마녀 대장(헤킷 : 3막 5장에서 뜬금없이 등장함)이고 맥베스 인생 망치려고 위장 결혼부터 계획한 거 아니야?' 같은 재해석도 해봤습니다ㅋㅋㅋ
<레이디 맥베스>라는 소설이 있는 걸로 봐서 이런 재해석의 가능성을 우리만 떠올린 게 아니었나봐요.
* 궁금해서 찾아보니까 소설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와는 전혀 관련없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러시아 소설이고, 같은 제목의 영화가 2017년 개봉했었다. 무려 플로렌스 퓨(<미드소마> 주인공) 주연! 볼만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더 일찍 조사해서 이 영화랑 같이 보고 이야기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는데 아쉽게 됐다..ㅎ 나중에 혼자서라도 봐야지! 보고 또 글써야겠다ㅎㅎ 소재가 많아서 좋군.
앞에서 부인이 가스라이팅의 표본이라고 언급했는데 그렇게 느낀 대사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맥베스로부터 예언에 대한 편지를 받고 그녀가 한 독백입니다. 노란색은 맥베스의 성품을 설명하는 대사고, 핑크색은 작정하고 남편을 악의 길로 인도하려는 부인의 독백이다.
다음은 1막 7장에서 맥베스가 암살을 망설이자 부인이 그에게 한 말입니다.
첫번째 페이지 : "야,, 그냥 하지 말자..." 죄를 의식함.
첫번째 페이지 : "왕위를 빼앗겠다고 한 건 술에 취해서 한 말이냐, 깨고보니 역겨웠더냐. 그럼 나에 대한 너의 사랑도 그런 줄 알겠다. 이 겁쟁이야." 하면서 남자의 사랑을 짓밟음.
두번째 페이지 : "남자다운 건 뭐든 하지! 근데 이건 남자다운 행동이 아닌 것 같아.." 맞는 말. 과감하고 무모한 행동이라고 해서 무조건 남자다운 건 아님. 그런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고 하지..
두번째 페이지 : "전엔 남자답게 말하더니, 이제 보니 아니네~ 만약에 나였으면 갓난아기의... (너무 잔인해)" 폭력적인 말로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음.
세번째 페이지 : "죽이고 나서는 시종들한테 피를 칠해서 덮어씌우자. 어차피 우리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슬퍼할텐데 누가 의심하겠어?" 걍 미친 싸이코임
세번째 페이지 : 결국 부인 기에 눌려서 암살하기로 함
2막 2장에서는 부인의 무정함이 또 한번 드러납니다. 왕을 죽인 다음, 뒤늦은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맥베스. 그걸 본 부인은 남편을 다그치며 단검에 묻은 피를 자기 손에도 묻혀서 왕과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시종들의 얼굴에 피를 묻힙니다. 남편보다 과감한 부인이네요.
평생 잔악무도한 인물인가 했는데, 부인도 죄짓고는 못산다는 인간이었긴 한가봅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야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는 그녀도 뒤에 가서는 정신병에 걸려서 자면서까지 암살 당시를 묘사하는 바람에 시녀들에게 죄를 들킵니다. 그러다 왕위를 되찾기 위해 왕자들을 포함한 연합군이 성에 쳐들어올 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죠. 죄책감 없는 순싸이코인줄 알았는데 그정도는 아니었던 거죠..ㅎ 다만, 더 비겁했달까. 인물들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그렸다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3. 명대사
'우산안까먹기'가 꼽은 명대사
맥베스는 잠을 죽였다.
<맥베스> 2막 2장
왕을 죽인 직후 맥베스의 대사입니다. 맥베스가 죽인 것은 왕뿐이 아니죠. 자기 양심,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평안한 일상을 죽인 것입니다. 의인법을 사용해 인물의 심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아주 희곡적인 대사라고 생각해서 명대사로 꼽았습니다.
'씀민'이 꼽은 명대사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곧바로 잊히는 가련한 배우.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맥베스> 5막 5장, 약간 생략해서 씀
폭군 맥베스가 연합군과 대치할 때 부인의 부고를 듣고 한 대사입니다. 윌리엄 포크너 소설 <소음과 분노(Sound and Fury)>를 알고 있어서,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을 잘 나타낸 것 같아서 명대사로 꼽았다고 합니다. 흔히 맥베스 명대사라고 하면 이 문장이 제일 유명합니다. 책 뒤에도 대놓고 그렇게 써있고요ㅋㅋㅋ
씀민이 문장을 꼽았을 때 저는 좀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씀민이가 아니라 이 문장이).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딱 이 문장이 가장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본문에서 마주쳤을 때 저는 그렇게까지 큰 감동이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문장을 똑같이 처음으로 보고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오랜 세월 유명했던만큼 누구나 이 문장을 명대사라고 느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더군요.
'김재님'이 꼽은 명대사.
지나친 말은 오히려 행동의 열기를 차갑게 식힐 뿐이다.
<맥베스> 2막 1장
시간의 모든 간격을 짧게 줄여주소서
<맥베스> 4막 3장
첫번째 문장은 공감이 되는 문장이라서 꼽았다고 합니다. 우리 셋 다 공감했습니다ㅋㅋㅋㅋㅋ 두번째 문장은 시간이 빨리 오면 좋겠다는 말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기발해서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글이 꽤 길어져서..
4. What if 마녀의 예언이 없었다면?
5. 관련 경험, 배경지식은 다음 글에서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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